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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걸 역사이야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꿍꿍이 속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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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작성일19-10-3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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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이준걸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아케치 미츠히테에 의해 살해당한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조선을 침략해 임진·정유재란의 7년을 끌다 1598년에 병사하고 전쟁은 끝이 났다.

  관동의 영유자이며 5대로(大老)의 우두머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회유책인 '사혼(私婚)금지'와 그의 아들 히데요리(당시 6세)에 대한 '충성의 맹약'도 무시하고 문치(文治)파인 7만4천명의 동군을 이끌고 도요토미의 추종자 5봉행(奉行)을 비롯하여 무단파 8만4천명의 서군과 1600년 천하를 가르는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の戰い)'에서 이긴 속 깊은 꿍꿍이가 무단파 일부를 끌어들인 유인책이었다.

  아무튼 도요토미의 집권 16년간의 업적은 일본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모모야마문화'를 이루었으며, 1585년 오사카성에 '황금다실'을 짓게 하고, 금은 보화 등 값진 물건만을 끌어 모은 축재에 도쿠가와는 무척이나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군자금으로 전용 안되게 재정의 탕진과 소비책으로 교토에 있는 호코지(方廣寺·1596년 지진으로 파괴)의 대불전 재건을 명했다. 범종을 주조해 달고, 개안공양을 한다고 1천명의 승려를 초청하고, 공양떡 600석, 3천동이의 술을 빚었다가 갑자기 도쿠가와家에서 행사의 연기 명령이 내렸다. 그 이유는 범종의 명문(銘文)에 관동(도쿠가와家)에 불길한 문자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안강(國家安康)'의 문자에 군주의 이름이 있어 불경하며 예법에 어긋날뿐 아니라 이름을 安자로 끊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신풍락(君臣豊樂)'은 도요토미를 군주로 모시고 번영한다는 뜻이며, 다음에 관동을 음으로 관서(도요토미家)를 양으로 (東迎素月 西送斜陽)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관동의 재앙을 기원하고 저주하니 그냥 둘 수 없다고 격노해 도요토미家의 재정책임자 가다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는 명문을 찬한 세이칸(淸韓)을 데리고 도쿠가와를 만나러갔다. 그러나 3가지 조건을 내걸고 만나주지 않았다. 이 명문에 대해 이미 막부의 유관(儒官)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문맥이 악담으로 점철된 저주문이라 단정했다.

  세이칸은 교토 난센지(南禪寺)의 승려로 한시에 능하여 임진란때 종군승으로 조선에 와 가토 기요마사가 대동해 그의 전과를 찬양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강경한 도쿠가와의 분노에 당황한 아사이 요도기미(도요토미의 첩, 히데요리의 생모)는 이를 무마코자 사자로 다이 조교오(大藏經)를 별도로 보냈다. 이때 도쿠가와는 전 사자와는 정반대로 요도기미 모자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종명의 건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것은 위장이며 같은 문제로 두 답을 듣는다는 것은 해결을 어렵게 혼동으로 몰아갈 이간책이다. 이 건으로 도리킬 수 없는 꼬투리를 잡아 완전한 정권장악의 명분으로 삼았다. 전 사자의 최후 경고성 통첩과는 판이한 정황을 보고하니, 요도기미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못한 가쓰모토를 관동으로 전향한 변절자로 낙인찍어 배척했다.

  이렇게 오사카의 어수선한 갈등과 회의가 마치 적전반란의 험한 분위기로 급전되자 도쿠가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사카출전' 명령을 전국의 다이묘(지방영주)에게 긴급 하달했다. 그들은 앞다투어 오사카로 통하는 길에는 무사들의 집단이 득실거리고, 강가며 산비탈, 들판 할 것없이 야영지에는 전장으로 떠나는 장정들이 차고 넘쳤다. 유사 이래 이리 많은 무사들의 집단행동을 보지 못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결국 범종에 새긴 문장을 트집잡아 사태는 단숨에 1614년 이른바 '오사카동의 공격(大坂冬の陣)'으로 번졌다. '게이죠기(慶長記)'에 의하면 '오사카출전'명령은 1614년 10월 1일이고, 공격은 12월 4일에 이루어져, 1615년 1월 20일 난공불락의 오사카성(1583년 축성)도 발가벗은 상태에서 5월 6일과 7일 연 이틀간의 전투 즉 '오사카하의 공격(大坂夏の陣)'으로 철옹성도 완전히 함락당하고 도요토미家는 멸망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리(23세)와 그의 생모 요도기미(49세)는 8일에 자살하고, 센히메(千姬:히데요리의 처·도쿠가와 히데타다 2대 장군의 딸)는 7일에 성을 탈출했다. <계속>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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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